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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일상/허튼소리

人義를 저버린사회

내다보는 창 2016. 2. 16.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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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義를 저버린다는 것은 …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한다는것과 마찬가지다,

수많은 옛고서속에도 인의를 저버린 자의 말로는 비참했다..

물론 모든 이가 인의를 저버림으로써 비참한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고서들 속에서는 인의를 저버린 자의 말로를 필히 강조한다.

 


*(참고:  중국전국시대 제나랑의 병법가“손빈” (軍師)(링크참조)의 지우였던 방연[ 龐涓 ]은 친구의 재능에 대한 시기심과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손빈을 첩자로 몰았고 이로 인해 손빈은 두 다리가 잘리는 “빈”이라는

잔혹한 형을 받으나  훗날 제기에 성공하여 방연을 심오한 병법으로 멸망시키고 만다. 이후 인의(人義)를 저버린 방연은 지금까지도

고금사에서 후인들에게 인의를 저버린 후환 무치 한자로 회자되고 있으니 인의를 저버린 자의 말로에 대한 경계가 되고 있다.)

 

 

 

 

이 뜻은 무엇일까?

경계함이 아닐까 한다…..

인의를 저버린 사회는 평화로이 지속될 수 없음을 옛 선인들은 지혜로서 깨달아

두루두루 모든 인간에게 인의를 저버리지 말기를 필히 경계함이라 생각이 들곤 한다.

비록 옛 세상이 물질적으로는 빈곤하였으리라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음은

그 시절에 인의가 풍부하였고

또한 인의를 논함이 당연하였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권력을 손에 쥔 자라도

제아무리 물질의 풍요를 이루어놓은 자라도…

당시의 가치관에서는 인의를 저버린다면 무릇가치 없는 인간으로 취급했으며

그렇게 살아온 인생은 허무한 모래성 같은 헛된 삶으로 인정했었다.

그 시절엔 그렇게에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인의를 저버리는 것을 금기로 삼았고..

많은 현모들은 인의를 저버리는 자식이 가문에 생기지 않기를 당부하고 경계하였던 것이다..


옛 조선의 역사만 보더라도 그렇지 아니한가..

피바람이 칼처럼 몰아치던 “수양대군 (세조)“의 시퍼런 서슬 앞에서도 사육신의 충신들은

군신의 의를 다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고

군신의 의를 저버린 신숙주의모는 세상이 부끄럽다 하여 대들보에 목을 매시지 않았던가.


고려시대를 지나 조 선 초기에만 해도 권력 앞에 또는 물질 앞에 굴하지 않는 초개와 같은 선비정신이

이 땅을 아름답게 하였지만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권모술수에 능한자들이 득세를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가면서  이 땅에 인의는 당연한 듯이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당시의 수양은 조카를 몰아내고 진정한 충신들을 참살한 것에 대하여 평생을 죄책 속에 살다

말기에 들어선 결국 망상병까지 얻을 만큼의 부끄러움을 감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대한민국의 지배체재는 물론이고 사회곳곳에 물들 어퍼진 인의를 저버림을 쉬이 하고

부끄럽게 생각지 아니하는 습성은 결국이사회를 뿌리까지 병들게 하였다..

어떤 영명한 부모가 있어 인의를 다하여 초개같이 목숨을 버리라고 자식을 교육시킨다는 말인가

또한 누가 있어 불의를 보고 참지 말고 설혹 목숨을 저버린다 할지라도 뜻을 다하라

제자에게 교육할만한 스승이 있다는 말인가.

군신의 의도 실종되었고.

벗에 대한 예의 또한 사라져 버린지 금

누가 있어 낯도모를 이를 위하여 초개같이 삶을 포기할 수 있는 근본이 있다는 말인가.



윗사회나 아랫사회나

밝은 세상이나 밤의 세상이나…

근본이 사라져 버림은 매한가지이다…


예부터 자신을 보살핀 은인은 해하는 법이 아니거늘

현세에는  배신하는 자의 권모술수가  어찌 보면 약은 처세요

똑똑한 사람이라 추앙을 받는듯하니 가슴깊이 통탄해 마지않는다….



필자 주변의  밤의 세상에도 이러한 자들이 수두룩하다..

자신의 자리를 보살핀사람에게도 권모술수를 아낌없이 베푸는 치졸한 존재들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활보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이사회가 병들었기에 그것을 책망하고 그런 이를

부끄러 히 생각하여 경계하는 올바른 군자들이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세상의 근본이 바뀌지 않는 한은 사회는 명랑하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운 자를 부끄러 히 생각하지 않는 세상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작금에 두드러지는 사회적 이슈들도 결국 모두인의를 저버린 사회의 근본이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어두운 것이던 밝은 곳이던 그 나름대로의 인의는 존재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 근본이 지켜지는 사회가 되야만이 세상은 맑은 곳은 맑은 것대로 아름다울 것이고 어두운 것은 또 그 속성만큼 의로울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치졸한 임꺽정전의 “서림“같은 무리들이 부끄럽지 아니하고 머리를 곧이 세운 세상이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다,

내 주변에도 이런 이들이 오히려 득세를 함의꼴을 면면히 보려니 아무래도 울화통이 치밀어서 몇 자 적어 내렸다…..

어찌 보면 이런 글을 적어 내림이 나 자신부터 되돌아보는 반성의문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글을 끝맺음 하면서 조선조 삼대의 적중의 한인물인 임꺽정의 짧은 설명글로 의의 근본을 적어보려 한다..

*임꺽정(林巪正, 1504~ 1562년)


조선 명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巨叱正) 등으로도 쓴다.

생애[편집]
경기도 양주(楊州)의 백정으로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아전과 백성들이 도와 잡지 못하였다.

1559년(명종 14년)부터 황해도·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해하는 한편 창고를 털고 빈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다. 황해도 장연(長淵)·옹진(甕津)·풍천(豊川) 등지에서 관군이 토벌을 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내응 하여 이를 피했다.

1560년(명종 15년)부터 점차 세력이 위축되던 중 1562년(명종 17년) 음력 1월에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인해 구월산(九月山)으로 철수하여 항전하다가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1]

평가[편집]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장길산과 임꺽정을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라고 평했다. [2]

*동양의 문화는 미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도리가 있던 옛적의 문화로의 회귀라 고했는데...

앞으로 만치 달리는 서양의 문화 속에서 일그러진 자화상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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